김정은의 괴벽
4시간 하늘길 대신 60시간 철로, 왜?

조선일보DB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제2차 미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23일 오후 평양역에서 전용 열차를 타고 출발했다. 이 열차는 23일 오후 9시 30분쯤 북중 접경지역인 단둥을 지났다고 외신은 전했다. 24일 오후 1시쯤에는 텐진역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까지 김정은이 대외적으로 정상 국가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로 향할 가능성도 거론됐다. 하지만 김정은은 4시간이면 될 하늘길을 놔두고 60시간 이상 달려야 하는 4500km 철로를 택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19세기 마인드의 지도자가 21세기에 20세기식 열차 의전(儀典)으로 이벤트를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김정은이 정상국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괴벽(怪癖)’에 가까운 60시간 열차 이동에 나선 배경은 뭘까. 국내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비행기를 이용하기엔 안전 등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을 것"이라면서도 "중국 대륙을 열차로 관통함으로써 북⋅중 혈맹 관계를 과시해 미국에 압박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할아버지 김일성이 했던 방식을 따름으로써 정통성 과시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6월 10일 오후 2시 36분(현지 시각) 중국국제항공(에어차이나) 소속 보잉 747기편으로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오른쪽부터 김정은, 통역을 맡은 김주성,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리수용 노동당 국제부장, 리용호 외무상. /연합뉴스
◇안전, 中 비행기 대여 시 위신 저하 감안한 듯 우선 김정은은 전용기인 참매 1호 안전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특별열차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참매 1호는 옛 소련 시절 제작된 일류신(IL)-62M을 개조한 것으로 비행 가능 거리는 1만㎞다.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2760여km 거리는 3~4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참매 1호는 생산한 지 올해로 35년이 된 데다 북한 내에 장거리 운항 경험이 있는 조종사가 부족한 것이 취약점으로 꼽힌다. 김정은 신변 안전을 위해서도 전용열차가 유리하다. 항공기는 이륙 이후 쉽게 운항 루트가 노출될 수 있어 외부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이 단점이다. 반면 김정은 전용열차는 방탄·방폭 기능과 박격포 무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발 상황 시 열차에서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는 방탄용 벤츠 차량이 여러 대 탑재돼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은 공식적으로 해외에 나갔던 8번 모두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 방문 때는 왕복 4만㎞를 총 24일간 열차로 이동하기도 했다. 안전 때문이었다. 또 작년 6월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에 이어 두번 연속 중국 비행기를 빌릴 경우 김정은 위신이 떨어질 것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노이의 김일성 - 북한 김일성이 1958년 하노이를 찾아 호찌민 당시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김일성은 1964년에도 하노이를 찾았다. /TV조선
◇‘김일성 따라하기’로 정통성 강화 김정은의 전용열차 행로는 과거 김일성의 발자취를 따라갈 공산이 크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왕조국가인 북한에서 할아버지 김일성을 따라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일종의 권위를 부여하는 셈이다. 김일성은 1958년과 1964년 두 차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평양에서 베이징까지 열차로 간 뒤 베이징에서 중국 항공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당시 김일성은 3일간 베이징에 머물면서 마오쩌둥 주석, 저우언라이 총리 등과 회담을 했다. 김정은이 탄 전용열차도 베이징을 경유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노이로 가는 길에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할지도 불투명하다. 신범철 아산연구원 통일안보센터장은 "시진핑 주석과는 이미 1월에 만났기 때문에,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결과를 공유하기 위해 베이징에 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난 1월 8일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신화망
◇북중 혈맹 과시해 대미 협상력 높이려는 듯 김정은이 전용열차를 타고 중국 대륙을 관통하면 중국과 북한이 돈독한 혈맹(血盟)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효과도 있다. 실제로 중국은 북한 이외 다른 나라 정상이 제3국으로 이동할 때 대륙 철도를 내준 경우가 없다. 신범철 센터장은 "중국이 김정은에 철길을 내줌으로써 ‘두 나라는 운명 공동체, 변함없는 순치(脣齒·입술과 이) 관계’라고 말한 것을 방증한다"고 했다. 이를 통해 북한과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는 효과도 노렸음직 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북한엔 중국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2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을 오판하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운 길’이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살길을 찾 겠다는 뜻이다. 장시간 열차로 이동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효과도 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기싸움을 하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남 교수는 "김정은이 이동하는 것을 세계 각국의 언론인들이 실시간 보도하면서 주연과 조연의 역할이 바뀌어버리는, 자칫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조연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