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정권말 남북회담의 한계
대통령 임기말의 국정이란 것은 본래 끈 떨어진 연처럼 표류하기 십상이다. 남북문제 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다. 국정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의 남북회담에서는, 남측은 그간 논의된 사업들을 최대한 진전시켜 대북정책의 성과를 극대화하려고 하는 반면, 북측은 대화 의지를 과시하면서도 모든 실질적인 논의는 차기 정부로 이월시켜 새로운 차원의 협상을 모색하는 남북이몽(南北異夢)의 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우려는 진전된 합의문을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제9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도 현실로 나타났다. 일부 협상 일정이 다음달중에 예정되어 있기는 하나 국민의 정부의 마지막 고위급 회담인 9차 장관급회담이 마침내 막을 내림으로써 포용정책의 결실인 당국 차원의 남북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지난 94년 핵위기 당시 남북한 간 대화의 통로가 막힘으로써 문민정부가 북·미 간 협상을 그저 관전만 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회고해 볼 때 금번 회담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사실 적지 않았다. 특히 핵문제가 8차 장관급회담 당시보다 더 심각해진 만큼 이번 회담에서는 핵문제 해결의 단초가 제공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이번 회담은 출발부터 양측의 목표가 어긋나 있었다. 남측은 ‘핵문제 해결의 계기가 되는 실천 조치 약속’에, 북측은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는 민족 공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북측은 수일전에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북·미 간의 문제라는 입장을 조총련계 언론에 흘림으로써 ‘민족 공조’ 확보 전략은 이미 회담 시작 전에 감지되었다. 이에 따라 이번 회담의 한계는 회담 개시전에 분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사실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실천 조치의 확보 방안이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마련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한반도를 둘러싼 핵의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조망할 때 순진한 발상이다. 핵 위기를 통해 체제 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려는 북한으로서는 협상의 상대방은 결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망각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번 회담을 자신들의 입장을 최대한 홍보하고 선전하는 무대로 활용하는 데 1차적인 회담 성사 의도가 있었다. 당초 일정에 없는 ‘회담 공개’ 요구라든가, 특정 방송사에 기조발언문을 무단으로 제공한다는 등의 이례적인 행동들은 역설적으로 핵문제로 인한 초조감을 표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 핵문제의 안보리 회부를 시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신경전에 남측을 활용하고 한·미 공조에 균열을 내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우리측이 핵 문제와 관련한 북측의 전향적 입장이 반드시 공동보도문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으나 북측의 입장은 오히려 민족 공조의 문구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과연 북측이 진정으로 핵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남측과 ‘진지하게’ 논의할 자세가 돼 있는가 하는 회의를 갖게 했다.
협상과 선전을 병행하는 북한측 전술은 이번 회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북측의 재난(災難)은 남측에도 적용된다는 북측 수석대표의 발언은 결국 북·미 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회담이라는 무대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실천 조치를 마련하는 데 있어 효용성이 낮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그나마 핵 위기 가운데서도 과거와 달리 남북한이 대화의 테이블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면 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의 성과는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경의·동해선 연결, 개성공단 착공식, 금강산 육로관광 등 3대 현안 사업의 2월 성사와 남북 관리구역내 군사분계선(MDL) 통행 문제 등 주요 현안들도 타결되지 못했다. 이제 남북 관계 개선은 심각한 핵 위기를 안고서 차기 정부로 이월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핵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향후 차기 정부의 각종 남북회담도 이번 회담의 비생산성과 소모성을 재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반도 문제가 남북한 당사자의 손을 떠나 국제사회로 넘어가게 되는 우(憂)를 범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