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맞은 北 식량정책
북한의 식량배급제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남측 언론은 지난 3월 1일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가기관과 기업소에 대한 식량 배급을 전면 중단토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개성 경제실무회의에 참석한 북측 회담 관계자는 식량 배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남측 언론의 보도가 오보라고 반박하는 등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식량배급제 폐지 논란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식량 공급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북한 경제 개혁·개방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량배급제 폐지 문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다. 우선은 긍정적인 해석으로, 북한의 경제개혁 가속화라는 점에서 사태를 파악한다. 북한은 지난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실시하여 일반 근로자들이 식량 소요량의 50%를 농민시장에서 구매토록 함으로써 식량배급제를 사실상 폐지했다. 다만, 개인 소비 활동이 불편한 국가기관과 로동당 간부 등 소수 특권층에 대한 식량 배급은 체제 유지 차원에서 지속하고 있다. 북한의 저곡가(低穀價) 정책은 수 십 년간 북한 당국의 막대한 양곡 적자로 이어져 재정 파탄의 원인이 됐다. 북한 당국은 이중곡가제 지탱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식량 가격을 대폭 현실화하면서 금기시하던 시장(Market)이 해결사 노릇을 하도록 했다. 사회주의 체제의 중요한 보루인 ‘먹는 문제’는 이제 개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된 것이다. 이번 식량배급제 폐지는 7·1경제개혁의 후속 대책으로서, 일반 근로자 대상의 배급제를 전면 중단하는 동시에 국가 기관도 식량 확보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함으로써 개혁을 가속화시키는 의의를 갖고 있다. 특히, 북한이 연초부터 중국 접경지대를 공식 개방하는 등 북핵 문제로 인한 국제사회의 경제적 압박을 내부 개혁 조치로 해결하려는 것으로서, 배급제 폐지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음은 부정적인 해석으로, 배급제 폐지는 식량 부족에 따른 고육지책의 조치라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8년 만의 대풍작으로 415만t의 식량을 생산했지만 여전히 최소 소요량 500여만t보다 90여만t이 모자란다. 하지만 달러가 부족한 북한이 국제시장에서 곡물을 상업적으로 수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부족량은 예년처럼 남측이나 중국에서 지원받는 방법으로 보충돼야 한다. 외교협상에 능한 북한일지라도 이러한 회담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북한에서 4∼6월은 전년도 쌀 생산량이 바닥나고 감자가 생산될 때까지 기근이 계속되는 고통스러운 ‘감자고개’ 시기이다. 감자고개를 넘기기 위해서는 당국의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일반 근로자는 물론이고 국가기관까지 배급을 중단하여 식량을 자체 조달하게 함으로써 공급 부족에 따른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식량 부족이 불가피하게 배급제 중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상반된 분석은 복합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식량 부족 사태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식량 배급제 폐지를 공론화한 적이 없었다. 경제 개혁 관점에서 이번의 공개적인 배급제 폐지 논의는 시장 기능을 활성화하여 사회주의에 실리를 첨가시키는 조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국가의 무능력을 인정하여 중국 국경에서 개인적으로 식량을 조달하는 행위를 방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배급제 폐지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식량 생산량이 소비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만성적인 부족사태를 소비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당국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량 자체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배급제를 통해서든 아니면 시장을 통해서든 근본적인 식량 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협동농장의 곡물 생산 체제를 개혁하여 증산을 달성하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7·1경제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개인 영농의 범위를 확대하고 시장 가격이 생산과 소비의 기준이 돼야 한다. 식·의·주를 국가가 책임지는 고전적 사회주의는 북한에서도 수명이 다하고 있다. 남성욱 / 고려대 북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4/04/12